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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신석기 문화는 황하문명에서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 대략 기원전 6000년에서 5000년 경 중국 전역에서 신석기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봄.
각처의 신석기 문화들은 구석기 만기 문화와 연속성이 있음이 드러났음.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각 지역의 신석기 문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각자의 성격이 독특하여 어느 한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발견할 수 없음.
- 신석기 문화 발전에 대한 중국의 기본적 인식은 '앙소 → 용산식(Lungshanoid) → 용산문화'의 계기적 발전임
이외 문화(묘저구 2기문화, 대문구문화, 청련강문화, 굴가령 문화 및 절강·복건·광동·대만 등 채도를 포함한 여러 문화)를 용산식에 포함하여 신석기 문화의 기원과 발전을 일원론적으로 이해함.
이는 중화주의 또는 중원중심주의의 선입견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음.
- 밝혀진 바에 의하면 중국 각처의 신석기 문화는 실제 각 해당지역의 선행문화를 모태로 독자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수준도 중원의 신석기 문화에 뒤쳐지지 않음. 이러한 맥락에서 소병기의 지역별 문화권 설정 제안이나 다중심 발전론 또는 다양성이 강조되기 시작함.
2. 신석기 문화의 특징
① 농경과 가축의 사육(마제석기, 도기의 출현과 식량의 채집에서 재배·생산으로의 발전)
- 작물은 상·주 시대 이후보다는 미비함
- 생산공구는 문명단계 이후의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발달
- 농법은 화경 농법을 벗어나지 못함
- 잉여생산의 증대와 이에 따른 비농업 인구의 출현이 확실시
(양저문화의 시비술(하니와 청초를 혼합 발효), 대문구문화의 초기 유지에서 발견된 고병배-곡물로 술을 빚은 증거, 다양한 형태의 정치한 도기가 대량생산됨)
② 수공업의 발달
- 식량의 잉여생산이 배경
- 상·주 시대의 도기나 청동기물과 기본적으로 형태가 동일한 저장용, 취사용, 제사용 도기가 대량 생산됨
이에 따라 마광 흑도가 출현(계란껍질처럼 얇고 표면이 빛나 신석기 도기 중 최고로 침)
제의 및 장식용으로 생산된 정교한 옥기, 상아로 만들어진 공예품 등 대거 생산
- 마·견직 수공업의 시작 (양저문화 전산양 유지에서 마포와 비단조각이 출토됨)
- 야동기술 발전 가능성 존재(앙소문화 강채 유지에서 아연 25%를 함유한 황동편 등 발견, 산동 교현 삼리하 유지에서 추형동기 발견)
③ 인구 증가
-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인구가 증가
- 대규모 취락의 출현이 단적인 증거 (농경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 하천 및 그 지류에 가까운 구릉 또는 대지, 교통이 편리한 곳 3 요소가 충족된 곳에서 많이 발생)
A. 서안 반파촌(조기 앙소문화)
B. 섬서 임동 강채 Ⅰ기문화 (앙소문화 반파형)
4,000여 제곱미터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100여개의 대·중·소의 방옥이 5군으로 나뉘어 집중 분포되어 있음.
이 중 중·소 방옥 20여개로 구성된 5개 방옥군이 80여 제곱미터의 대형방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각 방옥은 모두 중앙광장을 향해 문을 내고 있는 점이 특징
이는 촌락이 5개 씨족 또는 혈족 집단으로 구성된 사정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당시 사회구조가 촌락 구조에 반영된 중요한 사례임.
C. 내몽고 홍륭와 유지
호구로 둘러싸인 불규칙 원형, 내부에 방옥이 12열로 배치되어 있음. (촌락 내부의 구조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
반파촌과 강채촌이 모두 호구로 둘러싸인 것과는 달리 돌담벽으로 둘러 싸여 있음(홍산문화기의 석성보와 함께 용산문화 만기의 성의 출현을 예고하는 사료)
④ 대형건축의 발전
- 반파촌의 대형방옥 : 공공집회 장소로 추정, 단간(單間) 구조
- 정주 대하촌 유지 대방옥(앙소 후기) : 복수가족 공동주거용, 다간(多間) 대형 방옥 출현 시작
- 감숙 대지만유지 901호 방지(앙소 만기) : 정주 대하촌 유지 대방옥의 확대 발전형, 중국 신석기 시대 최대 방옥, 집회 및 제의용의 부락연맹의 회당으로 추정(주변 1,000여 제곱미터 내에 다른 방지가 없음, 주거용이라기엔 복잡한 구조)
- 대형 방옥이 부락연맹의 공동집회소 혹은 공동신전 역할을 하였다는 추정의 근거
A. 홍산문화기 우하량 유지 여신묘의 경우 취락에서 멀리 떨어진 산정에 있는 점에서 단일 취락의 신묘로 보이지 않음.
B. 홍산문화기 나체영부 도소상이 출토된 석체건축군 유지의 경우 규모(60m*40m)나 주변 취락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한 부락 전용이라기 보다 부락연맹의 제의중심으로 보임.
⑤ 수장(首長) 존재의 상정 가능성
- 취락 내외의 대형건축이 취락 또는 부락연맹의 공동집회소 내지 공동신전이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전제
- 우하량 여신묘 남쪽에서 조사된 대형 적석총 (당시 부락 부락연맹의 수장이었을지도 모르나 파괴 및 도굴로 부장품이 발굴되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음)
- 반면 수장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는 부장품이 나온 곳도 있음
A. 상해시 청포현 중고공사 복천산 인공토돈(높이 6m, 남북 84m, 동서 94m)
B. 강소성 상주 무진의 사돈(寺墩)의 타원형 인공토돈(높이 20m, 동서 100m, 남북 80m)
C. 위 묘들에서 주목할 점
토돈 자체가 묘장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영된 고대(高台)이다.
일반 씨족공동묘지가 아니라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의 매장을 위한 묘지로서 막대한 노동력이 투여되었다.
부장품의 양과 성격(권력과 신분의 상징으로 보이는 예월, 제기인 옥종 및 옥벽 등 출토)
D. 권력 세습의 가능성 추정
부장품 중 생산 공구가 거의 없음
사돈묘의 경우 주인공이 20세 전후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밝혀짐
생산과 유리된 존재임을 알 수 있으며 권력이 세습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⑥ 모계씨족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 등의 사회구조 변화
- 권력의 형성은 씨족제도 및 결혼제도의 변화, 사회적 분업의 발생, 사유제의 성립과 발전, 계급과 신분의 분화 등 전반적인 사회구조의 변화와 병행하여 이루어졌으리라 봄
- 중국의 연구자들은 기원전 3000년 경 모계씨족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과 함께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 그리고 다시 이것이 부분적인 일부다처제로 발전, 이와 병행한 부계가족 중심의 사유제 발전과 계급분화란 도식에 대체로 긍정적임.
- 묘지 부장품에서 알수 있는 소수에게로의 재부(財富)의 집중
A. 대문구 묘지
| 반파 묘지 | 대문구 묘지 |
| - 단인장·다인합장 단계 - 총 25좌 중 2좌가 다인합장(각 2인, 총 4인) - 부장품 출토 현황 71좌에서 308건 1묘당 최다 경우가 10건 7건 이상은 25%에 불과 |
- 단인장·부부합장 단계 - 117좌가 조사됨 (성인남녀 합장은 8좌) - 부장품 출토 현황 아예 없는 곳 8좌 1~5건 전체의 50%, 6~9건은 25%, 10건 이상 25% 5좌 대묘에서 출토된 도기는 전체 출토도기의 25%를 차지 부장품의 종류도 다양함 |
| - 대문구사회가 반파사회에 비해 생산력이 크게 앞섰음 - 대문구사회에서 반파사회보다 소수에게 재부가 편중된 것을 알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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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산서성 양분현 도사유지(용산문화기, 기원전 2875±185 ~ 기원전 1905±95)
총 780여 묘지 출토, 이 중 대형 9, 중형 80여개, 소형 610여개
대묘 : 모두 남성이 주인, 100~200건에 달하는 부장품 출토
(이에 비해 중형은 1~2건, 5~6건 / 소형은 절대다수가 부장품이 없거나 나와도 자질구레한 물품만 나옴)
이는 재부가 소수 그것도 남성에게 집중된 것을 보여주는 것임.
⑦ 제례의 발달과 이로 인한 인간 상징체계의 발달
- 제례의 발달은 소수에게로의 재부 편중화에 따른 씨족공동체 사회의 해체에 대한 대안이었음
- 제례의 발달에 의한 인간 상징체계의 발달
제례가 발달함에 따라 점복·음악·상징부호도 더욱 세련되고 체계적으로 발달함
그리고 이는 문명 초기의 문자와 수골·귀갑점으로 발전함
권력의 집중 및 빈부가 양극화된 사회의 제례가 복잡하고 다양한 음악에 의해 뒷받침 됨(도사유지의 토고, 타고, 석경)